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은 대개 아프다. “브루투스, 너마저?” 문제는 브루투스가 아니다.
너도 나와 같을 거라는 맹신, 우리 사이엔 거리가 없다는 오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조차 동일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하나’라는 집착이 비극을 낳는다. 그 틈 없는 뜨거움이 서로의 숨을 살라 먹고,
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함께 보는 것”
이라 했다. 하나가 아니라는 불안 속에서도 끝내 둘로 남고자 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환희.
사랑만이 아니다. 관계의 감각은 다름을 인정하는 적당한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탱고를
추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이가 탱고를 서로 부둥켜안고 추는 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춤을 추는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몸을 안아 맞닿으면서도 똑바로 설 수
있는 편안한 간격을 찾는 일이다. 탱고는 혼자서도 똑바로 설 수 있는 두 사람이 무게중심을
맞춰 함께 걷는 것이 전부인 춤. 두 사람이 끊임없이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간격은 서로
다른 몸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춤을 추기
위한 전제다. 그 뒤에야 음악과 상대의 호흡에 귀 기울여 섬세하게 간격과 속도를 조율해가며
한 곡의 춤을 완성할 수 있다.
허리를 세우고 발바닥을 땅에 지그시 눌러 혼자 서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다. 그래야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고 나란히 설 수 있다. 관계에 의존해 기대거나 쓸데없이 견제하는 대신 상황이
변주하는 리듬에 유연하게 몸을 맡긴다. 때로는 말없이 기다리고, 필요할 때 손 내밀지만 리듬이
어긋나면 조용히 물러선다. 잠깐의 멈춤. 멋진 남자는 섣부르게 이 간격을 메우지 않는다. 그는 그 사이를
숨 쉴 여유, 생각할 틈,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남긴다.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은 대개 아프다. “브루투스, 너마저?” 문제는 브루투스가 아니다.
너도 나와 같을 거라는 맹신, 우리 사이엔 거리가 없다는 오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조차 동일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하나’라는 집착이 비극을 낳는다. 그 틈 없는 뜨거움이 서로의 숨을 살라 먹고,
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함께 보는 것”
이라 했다. 하나가 아니라는 불안 속에서도 끝내 둘로 남고자 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환희.
사랑만이 아니다. 관계의 감각은 다름을 인정하는 적당한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탱고를
추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이가 탱고를 서로 부둥켜안고 추는 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춤을 추는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몸을 안아 맞닿으면서도 똑바로 설 수
있는 편안한 간격을 찾는 일이다. 탱고는 혼자서도 똑바로 설 수 있는 두 사람이 무게중심을
맞춰 함께 걷는 것이 전부인 춤. 두 사람이 끊임없이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간격은 서로
다른 몸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춤을 추기
위한 전제다. 그 뒤에야 음악과 상대의 호흡에 귀 기울여 섬세하게 간격과 속도를 조율해가며
한 곡의 춤을 완성할 수 있다.
허리를 세우고 발바닥을 땅에 지그시 눌러 혼자 서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다. 그래야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고 나란히 설 수 있다. 관계에 의존해 기대거나 쓸데없이 견제하는 대신 상황이
변주하는 리듬에 유연하게 몸을 맡긴다. 때로는 말없이 기다리고, 필요할 때 손 내밀지만 리듬이
어긋나면 조용히 물러선다. 잠깐의 멈춤. 멋진 남자는 섣부르게 이 간격을 메우지 않는다. 그는 그 사이를
숨 쉴 여유, 생각할 틈,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남긴다.
